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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나홀로 키를 잰다

나홀로 키를 잰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 때문에 자괴감에 빠진다. 모든 것이 공평하고 높낮이가 없으면 잘 났다는 착각도, 무시 당한다는 비참한 생각도 들지 않을 것이다.     자괴감은 자신을 낮추고 자책하는 대 비해 우월감은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게 낫다고 생각하는 감정이다.     도토리는 키 재기를 안 하지만 사람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키 재기 한다. 네 콩이 크니 내 콩이 크니 하고, 참깨가 길다느니 짧다느니 치수를 잰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에겐 기 죽어 꽁지를 낮추지만, 서로 비슷한 수준이거나 정도가 고만고만 하면 깔고 뭉개서라도 고지 탈환을 꿈꾼다. 졸부는 졸부끼리, 못난 사람은 못난 사람끼리 키 재기 한다. 진짜 부자는 키 잴 필요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부자 티가 난다.   개똥철학의 달인이신 어머니는 오빠가 동네 애들과 싸우면 종아리를 때렸다. “싸움은 위를 쳐다보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 배울 것이 있다.”며 끼리끼리, 비슷한 수준끼리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은 쓸모가 없는 시간 낭비라는 깊은 가르침이다.   나이 탓인가. 해가 바뀌자 방송이나 유튜브에 나오는 새해 운수에 귀를 쫑긋 세운다.     마음에 송송 구멍이 난 때문일까. 몇 주째 한파에 눈과 비가 쏟아져 태양 본 적 없어 우울증에 걸렸나. 가슴 떨리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 찬란했던 청춘의 날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절망,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오늘을 지키기도 힘들다는 무기력함, 어떤 사람들에겐 사는 것이 죽는 것만큼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리저리 시작도 꼬리도 없는 불안한 생각에 젖어 새해 한 달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하릴없이 집구석을 돌아다녔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단편소설의 대가 현진건 ‘운수 좋은 날’의 명대사다.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으로 살아가는 김첨지는 열흘 넘게 돈 구경을 못한다. 아프다며 나가지 말라는 아내를 뿌리치고 집을 나선 김첨지는 많은 손님을 받아 큰 돈을 벌지만 내내 불안감에 시달린다. 집에 들어가기 불편해서 선술집에서 친구 만나 술을 마시고 아내가 그토록 먹고 싶어했던 설렁탕 국물을 사 들고 집을 들어서는데 아내는 죽어 있다.     김첨지는 운명에 얽매어 산다. 가난과 질병, 하층계급의 비극적인 삶은 돈으로도 극복이 안 된다. ‘행운의 상승과 함께 불운의 상승’이라는 대립병치구조를 통해 우리들이 가장 행복했던 날에도 비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온다는 섬뜩함이 도사리고 있다.   할 일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아서 시작조차 두려운 공포에 시달린다. 20년 넘게 쓴 칼럼 정리해 출판사에 보내야 하고, ‘Color is My Life’ 자서전 집필, 전시회 준비도 해야 하는데 한 달째 땅 집고 허우적거린다. 개구리 헤엄치며 아무리 용을 써도 물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내 코가 열자면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쓸 것은 많은데 쓰지 못하고, 그릴 것은 많은데 물감을 입히지 못한다. 피노키오처럼 거짓을 입에 달고 살 수 없다.     거인들 앞에 서면 여전히 난장이다. 봉우리가 똑같이 높은 산은 없다. 스스로 키를 잴 시간이 왔는지 모른다. 갈 길이 높고 험한데 멈춰 서서 타인과 키 재기를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더 이상 애창곡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를 부르며 못다한 사랑의 편린을 그리워하지 않겠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도 어디까지 날아가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생각 때문 새해 운수 설렁탕 국물

2024-02-06

[아름다운 우리말] 감정의 위로

우리말은 감정에 대한 어휘가 발달한 언어입니다. 형용사가 발달하였다는 것도, 감각을 나타내는 말이 발달하였다는 것도 모두 감정과 연계됩니다. 의성 의태어나 색과 관련된 표현이 많은 것은 우리의 감정이 움직이고 보는 것의 다채로움을 알게 합니다. 어휘에 나타난 감정을 살피다보면 뜻밖의 위로를 얻게 됩니다. 마음이 참 편해집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말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아름답다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만, 중세국어에 나오는 아름은 ‘나’라는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름답다를 ‘나답다’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알맞아 보입니다. 이렇게 해석하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나다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내가 귀해야 모두가 귀한 거죠.   사랑한다는 말은 원래 생각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말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를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생각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기도 합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이 있어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이겨내는 힘을 갖습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강하다는 말은 참으로 맞습니다.   울다와 웃다는 울림의 감정입니다. 슬픔이나 기쁨에 앞서는 울림입니다. 울다에 나온 울리다는 이런 감정의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는 것은, 그래서 웃는 것은 근본적으로 ‘혼자’하는 일이 아닙니다. 함께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이 울면 같이 울고, 누가 웃으면 우리도 웃습니다. 감정이 울려옵니다. 거울효과라고도 하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합니다. 이건 노력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그대로 감정의 울림에 맡겨두면 되는 일입니다.   저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슬픔이 없는 인생은 불가능합니다. 헤어짐이 없는 삶이 없기에 슬픔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감정입니다. 그래서 싫었을 겁니다. 슬프다는 말과 싫다는 말은 어원이 같습니다. 슬픈 게 싫고, 싫은 게 많아서 슬픕니다. 여러 번 싫다와 슬프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슬픔을 피하는 방법이나 싫음을 이기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싫어하지 않으면 슬픈 일도 줄어듭니다.     기쁘다와 즐겁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둘 다 좋은 감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용하는 장면을 보면 기쁘다는 주로 개인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 반면 즐겁다는 여럿이 함께 느끼는 감정입니다. 배우고 익히는 것이 기쁘고, 벗과 함께하니 즐겁다는 논어의 구절이 기쁘다와 즐겁다를 잘 나누어 보입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하루하루 자라는 기쁜 삶이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바랍니다.   예쁘다는 보호하고 싶다는 감정입니다. 아름답다와 느낌이 다른 것은 보호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예쁘다면서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꽃도, 아이도,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그렇습니다. 어여삐 여긴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아끼는 것입니다. 아낀다는 말도 아깝다는 말과 연관이 됩니다. 쥐면 터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자식을 예뻐하고 아끼던 부모님의 감정이 떠오르는 말입니다.   우리말은 감정이 발달한 언어입니다. 감정이 발달하였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고, 변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이야기한 감정에 대한 단어를 보면서 마음의 위로가 생겼기 바랍니다. 말은 마음이고 감정이고 힘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감정 모두 감정 생각 때문

2022-07-24

[문화 산책] ‘꼰대’에서 탈피하는 법

 나이를 먹으면서 요즘 내가 신경을 쓰는 것 중의 하나가 글이나 말에서 꼰대 냄새가 나지 않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주제넘게 고리타분한 설교를 늘어놓으며 가르치려 드는 태도 말이다. 나도 모르게 그런 티가 넘치면, 글을 그만 써야지 생각하고 있다. 꼰대 냄새는 특히 글쓰기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노력하면 꼰대티를 많이 없앨 수 있다. 가령, 눈과 입을 주제로 쓴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고 치자.   “사람의 눈과 귀는 두 개씩인데 입은 왜 하나인가? 두 번씩 보고 두 번씩 듣고, 말은 한 번만 하라는 뜻이다. 꼼꼼히 보고 귀담아 잘 듣되, 말은 아끼라는 가르침이다.” 어딘지 교훈적이고 꼰대냄새가 난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어떨까?  “사람의 눈과 귀는 두 개씩인데 입은 하나다. 하나밖에 없는 입은 혼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고 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먹고 마시고 말하고 노래하고 숨 쉬고 재채기도 하고, 가끔은 입맞춤도 하고… 중요하게 하는 일이 정말 많다. 되도록 편안하게 쉬도록 해줘야 한다. 되도록 말을 적게 하고, 긴 수다는 절대 떨지 말고, 군것질 삼가고… 그렇게 쉬는 시간을 줘야 한다. 특히 말을 아껴야 한다.” 결국은 말을 조심하라는 교훈인데, 글이 풍기는 맛이 다르다.   사물을 보고 이해하는 관점을 바꾸는 것도 꼰대 냄새를 예방하는 좋은 방법이다. 모두들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의심해보는 시도도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선(善)의 반대는 당연히 악(惡)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렇게 선과 악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이분법은 서양의 과학주의와 더불어 20세기 인류의 보편적인 사유방식으로 정착한 것이라고 한다.     악은 나쁜 것이므로 없애버리고 응징해야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권선징악이니 선악과니 천당과 지옥, 천사와 사탄, 악마 등의 이분법이 진리로 우리를 지배한다.   이런 생각은 전쟁을 정당화하는 강자의 논리로 이용되기도 한다. 더욱 나쁜 것은 나와 다른 것, 내 이익에 반대되는 거추장스러운 것을 모두 악으로 규정하는 오만한 사고방식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전쟁, 파멸, 불행으로 얼룩져 왔다.     하지만, 동양의 깨우친 옛 어른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큰 스승 노자는 선의 반대 개념은 악이 아니라, 불선(不善) 즉 선하지 못함이라고 가르치셨다. 악과 불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훈몽자회’를 보면 선(善)은 좋을 선 즉 좋음이요, 악은 모질 악(惡)이요 염(厭) 즉 싫음이라고 설명한다. “악이란 모진 것이다. 모질다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다. 악은 모짐이요 싫음이요 불선(不善)이다. 그것은 단지 ‘좋지 않음’인 것이다.”   그러니까, 악은 개전의 여지가 없는 모질고 나쁜 것이지만, 불선 즉 ‘좋지 않음’은 응징이나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생각은 그렇게 다르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문화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의심하고 다른 각도에서 보고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그런 중요성이 새롭게 평가되면서 인문학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학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자유롭게 넘나들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인문학이 꼰대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된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좋은 꼰대가 되도록 이끌어준다. 이상으로 꼰대 잔소리 끝!문화 산책 탈피 반대 개념 생각 때문 전쟁 파멸

2022-02-02

[문화 산책] ‘꼰대’에서 탈피하는 법

나이를 먹으면서 요즘 내가 신경을 쓰는 것 중의 하나가 글이나 말에서 꼰대 냄새가 나지 않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주제넘게 고리타분한 설교를 늘어놓으며 가르치려 드는 태도 말이다. 나도 모르게 그런 티가 넘치면, 글을 그만 써야지 생각하고 있다. 민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꼰대 냄새는 특히 글쓰기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노력하면 꼰대티를 많이 없앨 수 있다. 가령, 눈과 입을 주제로 쓴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고 치자.   “사람의 눈과 귀는 두 개씩인데 입은 왜 하나인가? 두 번씩 보고 두 번씩 듣고, 말은 한 번만 하라는 뜻이다. 꼼꼼히 보고 귀담아 잘 듣되, 말은 아끼라는 가르침이다.” 어딘지 교훈적이고 꼰대냄새가 난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어떨까?  “사람의 눈과 귀는 두 개씩인데 입은 하나다. 하나밖에 없는 입은 혼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고 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먹고 마시고 말하고 노래하고 숨 쉬고 재채기도 하고, 가끔은 입맞춤도 하고… 중요하게 하는 일이 정말 많다. 되도록 편안하게 쉬도록 해줘야 한다. 되도록 말을 적게 하고, 긴 수다는 절대 떨지 말고, 군것질 삼가고… 그렇게 쉬는 시간을 줘야 한다. 특히 말을 아껴야 한다.” 결국은 말을 조심하라는 교훈인데, 글이 풍기는 맛이 다르다.   사물을 보고 이해하는 관점을 바꾸는 것도 꼰대 냄새를 예방하는 좋은 방법이다. 모두들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의심해보는 시도도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선(善)의 반대는 당연히 악(惡)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렇게 선과 악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이분법은 서양의 과학주의와 더불어 20세기 인류의 보편적인 사유방식으로 정착한 것이라고 한다.     악은 나쁜 것이므로 없애버리고 응징해야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권선징악이니 선악과니 천당과 지옥, 천사와 사탄, 악마 등의 이분법이 진리로 우리를 지배한다.   이런 생각은 전쟁을 정당화하는 강자의 논리로 이용되기도 한다. 더욱 나쁜 것은 나와 다른 것, 내 이익에 반대되는 거추장스러운 것을 모두 악으로 규정하는 오만한 사고방식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전쟁, 파멸, 불행으로 얼룩져 왔다.     하지만, 동양의 깨우친 옛 어른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큰 스승 노자는 선의 반대 개념은 악이 아니라, 불선(不善) 즉 선하지 못함이라고 가르치셨다. 악과 불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훈몽자회’를 보면 선(善)은 좋을 선 즉 좋음이요, 악은 모질 악(惡)이요 염(厭) 즉 싫음이라고 설명한다. “악이란 모진 것이다. 모질다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다. 악은 모짐이요 싫음이요 불선(不善)이다. 그것은 단지 ‘좋지 않음’인 것이다.”   그러니까, 악은 개전의 여지가 없는 모질고 나쁜 것이지만, 불선 즉 ‘좋지 않음’은 응징이나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생각은 그렇게 다르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문화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의심하고 다른 각도에서 보고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그런 중요성이 새롭게 평가되면서 인문학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학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자유롭게 넘나들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인문학이 꼰대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된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좋은 꼰대가 되도록 이끌어준다. 이상으로 꼰대 잔소리 끝!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모두들 새해 복 많이 지으시기를 빕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탈피 반대 개념 생각 때문 전쟁 파멸

2022-01-27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마음보를 다스리는 대안에 대하여

이미 이 땅에 없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불러오는 사진이나 영상은 하나의 기적처럼 여겨진다. 19세기 초에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가 처음으로 사진을 발명한 후 50년쯤 지난 1880년대에 그 유명한 코닥 회사가 세워졌다. 사진을 처음 접하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했을지 상상해보기는 어렵지 않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있다는 복음 역시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기적 이상의 내용이다.     기독교인이 되면 가장 우선적으로 변해야 하는 것이 세상을 보는 관점 즉 마음보다. 기독교인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본성에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입으로 시인할 때 갖게 되는 영성의 두 가지 본성을 갖는다. 일상생활을 할때 육신은 죄성과 약함을 포함하는 인간의 본성을 따라 살려 하고,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본성,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신성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본성은 자신에게 집착한다. 자기본위의 사람은 하나님은 물론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 없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할뿐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적대시한다.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시하며 성경은 그것을 부패한 본성이라고 지목하고 본성에 따른 육적인 삶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경고한다. 여기서의 죽음은 모든 생명체가 경험하는 육신적인 죽음이 아니고, 영혼의 괴멸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이 세상이 그들에게 가르친 많은 거짓된 내용을 삶의 정석이나 진리로 알고 살아간다. 남을 따라 살면서 어떤 인생이 잘사는 인생이라는 식의 획일적 선전 즉 거짓에 기반한 판단과 생각 때문에 불행하고 불만족스럽고 혼동된 채 살아간다. 그 거짓의 내용은 이 세상에 속한 영광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람들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무조건 더 많이 소유하고자 욕망한다. 불행하게도 욕망은 끝이 없다. 참 기독교인의 삶은 그래서 마음 속에 영적인 전쟁터를 둔 삶이다.     신약성경 27권중 무려 13권을 쓴 바울사도조차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로마서에서 고백하고 있다:“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 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원하지 않는 생각을 차단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원치 않는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대치할 수는 있다.     신학자인 닐 앤더슨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다: “오래된 불손한 생각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바꾸려고 노력하거나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중단시킬 수는 없다. 분명하고 깨끗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우는 일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사람이 거짓의 아비, (사탄)를 극복하는 것은 진리를 선택할 때뿐이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의 영은 죽을 몸과는 달리 살아있게 되고, 영에 의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영적인 삶을 살수 있는 세가지 단계로, “내게 오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교회이며,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먹으며 삶을 축하하는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할 때 의미가 있다. 그것이 교회와 일상이 조화되는 신앙생활이다. 저마다의 개성을 유지한 채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자 노력하는 것이 신앙여정이며, 모든 크고 작은 결정은 마음속에 있는 인성과 신성의 두 가지 본성이 충돌하여 일어나는 치열한 갈등의 결과물임을 인정할 때만 건전하고 깨어있는 신앙이 된다.     19세기인들과는 달리 바람처럼 먼지처럼 사라져간 사람들의 모습과 목소리와 영상을 생시처럼 생생히 다시볼 수 있는 것을 당연시하는 현대인들처럼, 기독교인은 사람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믿음은 선물이며 은혜다. 아이큐에 상관없이 은혜를 사모하기를.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마음보 대안 예수 그리스도 종려나무교회 목사 생각 때문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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